이구이오일삼.

 
어쩌다보니 '엔진'을 세 벌이나 샀다.

원래 비스무리한 것들은 최대한 피하려 노력하는 편인데 어느 날이었던가..
'바겐세일'이라는 백화점의 그렇고 그런 얄팍한 상술에 낚여
무려 10만원에 육박하는(이게 할인된 가격) 바지를 겁도 없이 덜컥 사버린 거다.

근데 집에 와서 입어보니 이쁘다. 맘에 든다.
뭐든 한 번 사면 오래 가지고 굴리는 성격이라 돈 생각은 금새 접었다.
까짓 10만원. 청바지 한 벌 값으로는 과분하지만 술자리 세 번만 안 나가면 된다.
한 달 정도 술 안 마신다고 죽는 거 아니잖나. 이건 최소 3년은 입을 텐데.
물론, 그 후로 술은 계속 마셨다. 이게 문제.

...



'뉴엔진'으로 명명되는 2세대 엔진을 살 때는 또 이랬다.

백화점의 상술에 무너진 나 자신을 애꿎은 술값으로 합리화 시킨 주제에
입다가 구석에 처박아놔서 때가 꼬질꼬질한-
이제나 저제나 빨아주기만을 기다리는 일명 '구엔진'을 보니 묘한 오기가 발동,
1세대와 3세대 사이에 2세대가 없으니 영 찝찝한 거라. 아.. 이거 편집증인데.

그래서 매장에 알아보니 뉴엔진 단종된 지가 백만년이우 이 양반아.
그렇다고 포기할 수야 있나?
이노무 몹쓸 승부근성이 중고시장을 뒤져 기어코 뉴엔진을 사고야 만 거지.
내가 이겼다 씨바. 아 뿌듯-

그래놓고 며칠 전,
'리바이스' 만의 독특한 디테일 전법?에 흥미가 동해 죽 늘어놓고 사진을 찍다가
문득 그때 그 시절 이구이오일삼의 아련한 기억이 떠올랐다.


292513


도대체 뭔 소린지 알 수는 없었지만 '닉스'는 우리를 열광케 했다.
292513.. 그게 뭐 중요한가. 열광했단 게 중요한 거지.
물론 난 사입지는 않고 열광'만' 했다. 예나 지금이나 닉스는 고가 브랜드니까.
아니 그럼 닉스를 안 입고 뭘 입었던 거지?
지금 생각해보니 내가 당최 뭘 입고 다녔었는지 잘 기억이 안 난다.

그래서 시간을 좀 더 거슬러 올라가보니 '안전지대'가 나오더라.
카더라 통신에 의하면 안전지대는 본래 재래시장에서 꼬꼬마들 코묻은 돈이나 챙기던
소규모 업체였는데 어느 날 '安全地帶'라는 한자 로고가 큼지막하게 박힌
까만색 야구모자가 야금야금 입소문을 타면서 메이저로 올라왔다는 거다.

그게 우리 자체 브랜드였는지, 아니라면 정식으로 라이센싱을 했는지,
국가적으로 망신살 뻗치는 '타미애킨스'나 '에비수'처럼 소비자를 우롱하는 업체의 전신이었는지
그딴 건 물론 모른다. 그게 뭐 중요한가.
암튼 나는 안전지대를 입고 싶어 틈만 나면 매장 쇼윈도 앞을 서성이다가
결국 화방에 가서 의류용 물감을 샀다. 시장에서 3천원짜리 티도 한 장 사고.

그리고는 방바닥에 신문지를 펴놓고, 매장 앞에서 주워온 택에 새겨진 로고를 모양 그대로 팠다.
비록 짝퉁이지만 나름 장인정신?을 발휘해 퀄리티를 살리느라 그거 파는데 1시간은 걸린 듯싶다.
다음 구멍난 택을 티셔츠 위에 올려놓고 물감으로 찍는 거다. 휴지 같은 거 뭉쳐서.


와- 그렇게 완성된 옷을 입고 나가니 다들 매장에서 산 줄 아는 거야.
이렇게 기쁠 데가 있나. 그걸 보고 강군은 [참 지랄한다]고 했다.

...



닉스가 청바지로 대박을 친 후 (주)태승트레이딩은 '스톰'이라는 차세대 캐주얼을 런칭했는데
그때 292513은 완전히 스톰 쪽으로 넘어갔다.
'GV2'와 '베이직'이 세계관을 공유했던 것과 같은 개념이다. 아직도 로고가 기억나네.

292513=STORM

별로 중요하진 않지만 궁금한 건 참을 수 없기에 좀 알아봤는데
역시 카더라 통신에 의하면 당시 개발팀에 있던 디자이너의 딸, 그 딸의 주민등록번호라더만.
한 자리가 모자란 건 개인정보 유출을 걱정한 세심한 배려인가보다.

이젠 돈도 있고, 엔진도 세 벌이나 있으니 마치 무슨 독일군 암호 같은 저 숫자엔
더 이상 미련이 없다. 혹시 모르지. 어느 날 갑자기 회가 동하면 또 '지랄'을 할 지도.
그게 뭐 중요한가.




 

덧글

  • wholic 2009/03/05 22:43 #

    청바지는... 그냥 편한 시장표 청바지가 좋아요. 그러고보니 저는 그렇게 열광한 아이템이 없는거 같네요.
  • 오리지날U 2009/03/05 23:50 #

    하나의 상품을 성능이나 필요에 의해서만 판단한다면 가격이 끼어들 틈이 없지만
    문화적으로 비루했던 당시는 유명브랜드 제품을 소유하는 것만으로도
    트랜드세터가 될 자격이 주어졌더랬습니다.

    그것은 곧 군중사회에서 소외 받지 않기 위한 소비행태로 이어졌고,
    부끄럽지만 제가 의류용 물감을 산 것도 그런 연유에서였습니다 ^^;

    물론 지금은 나이가 들어서 그냥 흥- 하고 코웃음 치지만요ㅋ
  • young 2009/03/05 22:53 #

    카더라는 지역마다 다른가 보군요
    292513

    2명의 손녀가 92년 5월 13일 태어났다 였는데 저희 동네는
  • 오리지날U 2009/03/05 23:42 #

    진실은 만든 사람만이 알겠지요 뭐 ^^
  • winem 2009/03/05 23:44 #

    전 뱅뱅...
  • 오리지날U 2009/03/06 00:38 #

    뱅뱅 잡으려고 나온 게 '써지오 바렌테'지.. 너 아는가 모르겄다.

    그나저나 텅텅 비워놓지 말고 너도 좀 꾸며.
  • 2009/03/12 11:30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오리지날U 2009/03/12 19:14 #

    오우- 마리떼 프랑소와 저버를 아시는군요ㅋㅋㅋ
    한때 거기 옷이 대히트를 쳤었지요 ^^; 가격도 드럽게 비싼 주제에ㅎ

    퀵실버는 뭐.. 지금도 나름대로 선방하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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