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부른 돼지.

 
돼지엔 감정 없다. 술 마실 때 가장 만만한 게 돼지인데 감정이 있을 리가. 오히려 고맙지.

예전에도 전혀 없진 않았지만 나이를 먹을 수록, 그리고 요즘 들어 부쩍 그런 생각이 든다.
좋은 직장, 좋은 차, 좋은 집. 그런 거 없으면 왜 인간답게 보지 않는 건지.
솔직히 말하면, '좋은 인간'의 기준을 어디에 둬야 하는지 상당히 혼란스럽다.
이런 생각을 중,고등학생이 아닌 다 큰 어른이 한다는 사실이 스스로도 참 한심하고,
아무리 발버둥쳐봐야 현실에선 딱히 답을 찾을 수 없다는 데에도 절망감이 든다.

멋모르는 꼬꼬마 시절엔, 막연하긴 해도 [개 같이 벌어 정승 같이] 쓰면 될 거라 생각했다.
근데 아니더라. 개 같이 버는 것도 힘들 뿐더러, 정승 같이 쓰는 건 더 힘들었다. 수많은 낙오와
실패의 과정속에서 문득 깨달았다. [노력하면 해결 되는] 그런 성질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결국은 국가적 규모의 구조 전환이 있어야 하고, 그에 맞는 사고의 변화가 필요하단 걸 말이다.

하지만 그게 가능한가? 안 된다. 딱 잘라 말해서 안 된다. 불과 몇 년전까지만 해도 몰랐다.
쉽진 않아도 최소한 불가능하진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근데 안 된다. 대다수 사람들의 머릿속에
박혀 있는 고정관념, 그리고 이 시대의 주를 이루는 커다란 흐름은 아마 역사에만 기록될 것이다.
동시대에서 손을 뻗어 어찌 할 수 있는, 그런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된 후에
나는 그냥 포기해버렸다. 아주 자연스럽게. 마치 먼 옛날부터 예정되어 있던 것처럼.
수 세기 후에, 수 세기 후의 사람들이, 수 세기 후의 사고방식으로 우리를 평가할 것이다.
당시의 세계, 그 중에서도 대한민국이란 나라에는 이러이러한 이데올로기가 지배하고 있었다고.


그러니까 나는 나름의 방식으로 그릇된 이데올로기와 싸워왔고, 앞으로도 그럴 생각이지만
그에 따른 다양한 경로의 손해를 감수해야만 한다는 게 너무나 힘들고, 절망적이란 얘기다.
나는 척박한 환경이라 해서 배부른 돼지처럼 살고 싶진 않다. 배부른 인간이라면 딱 좋겠지만
그런 건 극히 제한된 소수에게나 주어지는 특권이고, 아무리 날고 기어봐야 로또라도 당첨되지
않는 이상, 흔히 말하는 '주류'에 포함될 수 없다는 것 역시 누구나 다 아는 사실 아닌가.
그럴 바엔 차라리 마음이라도 편한 쪽이 낫다. 그래서 배부른 돼지보단 배고픈 인간을 택했다.
인간답게 살고 싶었다. 시간을 아껴야 했다. 무슨 게임마냥 리스폰이 되는 것도 아니고..
남아있는 시간만이라도 인간답게 쓰고 싶었다. 어차피 내 힘으로 어쩌지 못한다면 그게 현명하다.
적어도 나는 내가 패배자라거나 현실도피자라고 생각해본 적은 한 번도 없다. 언제나 당당히
맞서왔고, 언제나 분수에 맞게 행동했다. 이건 단순한 선택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가진 거 없이 살아도 남에게 폐끼치지 않고, 스스로가 만족한다면 대체 뭐가 문제란 말인가 !

불합리한 현실을 탓하고 싶지도 않다. 단지 나는 1900년대에 태어나 2000년대를 살다 가는 거다.
그걸로 됐다. 앞으로 점점 좋아진다 믿으면 충분하다. 어쨌든 나름의 투쟁을 하고 있으니까.
대개는 투쟁이 아니라 투정을 하는 쪽이 많지만 상관 없다. 내 투쟁에 태클만 걸지 않는다면.

그런데 요즘 부쩍 원치 않는 태클이 자주 들어와 골치다. 어느쪽이 인간인지는 내가 결정한다고.
그러니 돼지와 인간의 경계를 내 의지와 관계없이 구분짓지 말아줬음 좋겠다. 좋겠는데..
안 된다. 끊임 없는 스트레스의 연속이다. 왜? 도대체 왜 배부를 것을 강요하고 그에 부합하지
못하면 무시와 경멸을 일삼을까. 다수의 편에 서서 자위하는 건지, 아니면 부조리에 익숙하다 못해
아주 습관화 돼버린 건지, 그도 아님 설마 그런 게 정말 옳다고 믿는 건가? ..도무지 모르겠다.

내 바람은 그리 거창하지 않다. 그냥 인간다운 대우를 받고 싶은 거다. 그게 그렇게 힘든가.




 

by 오리지날U | 2011/01/22 05:59 | 이제는 말한다 | 트랙백 | 덧글(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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